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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저리 이야기
지난 2년간 저는 취재가 참 재밌었습니다
- 리얼숲
- 조회 : 382
- 등록일 : 2025-01-16
지난 2년간 저는 취재가 참 재밌었습니다.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저널리즘이라는 영역 바깥에 있다면 과연 생판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를 불쑥 들어볼 수 있을까. 분명 세상 어딘가 그런 직업이 있을 것이고 또 생겨날 수 있지만, 제 짧은 경험으로는 아직 기자와 PD를 빼곤 그런 직업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했던 취재들이 거창했던 건 아닙니다. 지역 사회에 뿌리 깊게 내린 문제점을 파고든 동기, 논문 수준의 과학 기사를 쓴 동기, 정당의 총선 공약을 꼼꼼히 짚고 분석해 본 동료들, 해외 취재를 통해 기후 변화의 문제점을 전문적으로 취재한 동료들에 비하면 매우 소소한 취재들이었습니다.
어디 공모전에서 상도 받아본 적은 없습니다. (네. 단비 언론상도 못 받아보고 이렇게 끝났네요...동기들 중에선 손에 꼽히네요...)
그럼에도 저는 취재가 재밌었습니다. 그때의 제가 문제의식을 느끼고 발제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았을 사안과 사람들을 기록하는 일은 딱 그때의 저만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오늘 세저리 이야기엔 어디에도 기록하지 않으면, 남지 않을지도 모를 제 세저리 생활과 취재를 여태까지 했던 취재를 중심으로 남겨보려 합니다.
1. 빅카인즈로 분석한 MZ세대
http://https://youtu.be/WZTgQPOUAKg?si=bQh9w-gFPFrWvgZ-
제가 고2였던 시절, EBS에서 한 다큐가 나옵니다. <왜 우리는 대학에 가는가?>.
가장 좋았던 건 오프닝 멘트였습니다. “우리의 진짜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저도 청년의 진짜 이야기를 담아보고 싶었습니다. 다만 뭔가 다른 접근이 필요했죠.
항상 안쌤이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가가 꼭 발제에 들어가야 하는데, 다 문제의식으로만 발제 해 오잖아!”
제가 선택한 방법은 빅카인즈를 분석하는 일이었습니다. MZ세대라고 불리는 청년을 향한 무지를 빅카인즈의 데이터로 보고 싶었습니다. 빅카인즈에 매체와 기간을 정해 MZ 세대라는 키워드를 집어 넣었습니다. 170여 개의 기사가 나왔고, 일일이 읽고 분석했습니다. 데이터를 다룰 줄 모르던 때라(뭐..지금도 딱히) 일일이 보고, 적고, 엑셀에 기록하고, 나름의 패턴을 분석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제가 썼던 방법으로(보다 고차원적으로) 연구를 진행한 교수들도 더러 있더군요.
해당 기획은 영상물이었습니다. 시각화가 중요했습니다. 화면 녹화, 모니터 촬영, 길거리 인터뷰, 전문가 인터뷰, 스토리텔러로 등장하기, 음악과 리듬을 각종 오브제와 결합하기 등 갖은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클릭한 시청자들이 떠나질 않길 바랐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서울숲에서 한 인터뷰입니다. 진짜 쪽팔렸습니다.
끊임없이 제가 종교인이 아니라는 걸 입증해야 했습니다.
근데 재미난 건 10번을 시도하면 2~3번은 저희를 참 재밌게 봐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야구에선 타율이 4할만 되도 강타자라고 합니다. 그때 제 타율은 막 2할을 넘긴 셈이었죠.
그렇게 만들어진 영상은 나름 조회 수도 올렸습니다. 박쌤은 맥주 한 잔 하시면서 그러셨습니다.
“너, 좀만 다듬어서 <추적60분> 보내고 싶은데?”
2. 고령 세대와의 브이로그
예전에 길거리에서 사진을 찍다 한 할머니께서 말을 걸어오셨습니다.
“학생, 나이 들면 못 해...젊을 때 많이 해”
웃으며 보냈지만, 의아했습니다. ‘그럼...나이 들면 아무것도 못 하나?’ 그런 생각을 간직한 어느 날이었습니다.
부서 전체적으로 노인 한 명씩을 담당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휴먼 다큐 시리즈를 제작하게 됐습니다.
제가 만난 할아버지는 여든이 넘었지만, 다양한 취미 활동을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센터에서 배운 영상 편집 기술로 좋아하는 트로트 가수의 뮤비를 만들곤 했습니다.
솔직히 촌스럽긴 합니다. 하지만 여든이 넘으신 나이를 생각하면 참 대단합니다. 이럴 수 있는 할아버지가 몇 분이나 될까. 차곡차곡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할아버지와 만날 때면, 뭔가 묘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좀 뜬금없지만, 대화를 하며 기억에 남는 건 운전과 관련된 말이었습니다.
“난 이제 차 없으면 안 돼. 그럼 더 늙을 것 같아. 저게 있으니까 이렇게 바깥 구경도 하는 거지.”
고령 운전자로 인한 사고가 많이 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운전이 없다면 시골에서, 지역에서, 집에서 할 일 없는 사람으로 존재하는 이들로 남아야 할까요? 어려운 문제지만, 현장에서 만난 노인의 이야기에선 대책 없는 제한이 폭력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http://https://youtu.be/B7-M6VIueQ8?si=MN6uxXjNNMGYGvNh
글이 길어질 것 같아, 시간이 나면 또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숏폼이 유행이지 않습니까?
제쌤이 그랬습니다. 세저리 이야기는 아무나 마음껏 허락 없이 자유 출판이 허가된 곳이라고...
아직 썰 풀게? 꽤 있습니다.
아, 갑자기 이걸 왜 쓰나 싶은 사람도 있을 겁니다.
글의 서두에 쓴 것처럼 그냥 디지털 공간 어딘가에 지난 2년을 좀 남겨도 되지 않나 싶어서요.
사실 그때그때 했다면 좋았겠지만...
또 그런 생각도 합니다. 기자와 PD 되는 게 참 힘든 세상입니다. 과거엔 막막해 보이는 이 과정에 ‘이 길이 맞나?’ 싶은 의심도 들었습니다. 바로 옆에서 공부하던 대학원 동기들이 취업을 할 때면, 나 역시 합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치만 난...안 될지도 몰라...’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루 단위, 일주일 단위, 또는 한 달 단위로 약해지기도 했던 감정을 붙잡을 수 있던 건 결국은 같은 꿈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사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 다음에...또
(나의 첫 생관위 짱이었던 지존되던 시몬님과 그 일당들. 경인일보, 아주경제, 한국일보...쟁쟁한 언론사에 들어갔다)
(팔을 걷으며 담배를 피우시던 박쌤을 4층에서 몰래 찍다)
(옥주쌤은 딸보다 준영이를 더 좋아하셨고, 지금도...좀 그런 경향이 있다. 참고로 가운데 두 명이 준영과 옥주쌤이다. 오른쪽은 옥주쌤의 딸이다.)
(혁규는 세저리이야기를 동기 중에 가장 먼저 썼다. 그냥 쓰는 세저리이야기를 무려 1시간 넘게 고민했다.)
(아마...2023홍보영상 임무가 주어졌을 때다. 브이를 하고 있는 건 기뻐서가 아니다. 아직...두 손가락이 편집기를 버티고 살아남았다는 뜻이다.)
(인생교향곡 시리즈를 취재할 때다. 뭔가 긴장감이 맴돌아서 방출해봤다.)
(날 좋을 때 치던 배드민턴. 스트레스 푸는 덴 이만 한 게 없다.)